약품분석 석사를 마치고 제약회사 품질관리 부서에서 일한 지 열두 해가 되면서,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문서와 실험기록서, 각종 승인 자료를 작성하는 데 사용했다. 결국 내 직무는 실험 장비만큼이나 볼펜을 많이 쓰는 일이었고, 그동안 수많은 볼펜을 손에서 닳도록 써온 경험 때문에 어떤 필기구가 끝까지 버티는지, 어떤 볼펜이 며칠 만에 소모되는지 내 손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수십 페이지씩 적어내는 업무 특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전투용이라 불릴 만한 볼펜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생겼다. 디자인만 마이크로피펫을 닮은 볼펜이 아니라, 실제 실험자가 매일 사용하는 도구처럼 견고하고 실용적인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실험실에서 사용하는 장비들은 단단하고 재현성이 높아야 한다. 작은 버튼 하나라도 수천 번 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