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을 흉내 내는 수준을 넘어서, 실험자의 손끝을 견디는 전투용 마이크로피펫 볼펜

약품분석 석사를 마치고 제약회사 품질관리 부서에서 일한 지 열두 해가 되면서,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문서와 실험기록서, 각종 승인 자료를 작성하는 데 사용했다. 결국 내 직무는 실험 장비만큼이나 볼펜을 많이 쓰는 일이었고, 그동안 수많은 볼펜을 손에서 닳도록 써온 경험 때문에 어떤 필기구가 끝까지 버티는지, 어떤 볼펜이 며칠 만에 소모되는지 내 손이 먼저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수십 페이지씩 적어내는 업무 특성 때문에 자연스럽게 전투용이라 불릴 만한 볼펜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생겼다. 디자인만 마이크로피펫을 닮은 볼펜이 아니라, 실제 실험자가 매일 사용하는 도구처럼 견고하고 실용적인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실험실에서 사용하는 장비들은 단단하고 재현성이 높아야 한다. 작은 버튼 하나라도 수천 번 눌렀을 때 처음과 같은 저항을 유지해야 하고, 반복된 사용에도 변형이나 성능 저하 없이 안정성을 보여야 한다. 그런 기준을 내 볼펜에도 그대로 적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어떤 외형을 만들지보다 먼저, 이 볼펜이 하루 몇십 번이 아니라 몇천 번을 눌러도 감각이 유지되는지를 기준으로 잡았다. 실험실에서 마이크로피펫을 다룰 때 손끝에서 느껴지는 탄성감과 클릭감을 볼펜에서도 구현하고 싶었다. 단순히 흉내 낸 구조가 아니라 실제 피펫을 오래 쓴 사람이 느끼는 익숙한 감각을 담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구조를 설계할 때도 가장 먼저 고려한 것은 내구성과 반응성의 조화였다. 일반 볼펜에서 흔히 생기는 유격 문제, 오래 사용하면 클릭이 헐거워지는 문제, 반복 필기에 따른 중심축 흔들림 같은 단점을 제거하려고 내부 구조를 처음부터 다시 설계했다. 금형 단계에서 비용이 계속 불어나는 문제가 있었지만, 품질관리자로 일한 경력이 오히려 그 과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했다. 실험에서 장비 검증이나 밸리데이션을 할 때도 변수 하나 때문에 전체 설계를 다시 떠올려야 하듯, 볼펜도 결국 그런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투용이라는 단어에 걸맞게 모든 부품은 반복 압력과 지속 필기를 견디는지 검토했고, 범용 리필심 중에서도 가장 안정적으로 필기 품질을 유지하는 규격을 채택해 일상에서 사용해도 흔들림이 없도록 조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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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역시 단순히 외형을 비슷하게 만드는 방식을 피했다. 마이크로피펫을 잡았을 때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닿는 면적, 몸체의 굵기, 상단 버튼의 높이와 눌리는 깊이까지 실험실 감각을 반영해 조정했다. 하루 종일 문서 작업을 하는 사람에게 불편함이 없도록 무게 배분도 신중하게 손봤다. 전투용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큼 오래 버티고, 오랜 시간 필기해도 손이 피로해지지 않는 균형을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다. 실험실에서 피펫을 오래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손가락이 적응하듯, 이 볼펜도 며칠만 써도 손이 먼저 익숙해지는 도구가 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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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이 제품을 만들면서 실험실에서 배운 모든 감각과 경험이 하나의 필기구 안에 녹아들길 바랐다. 장비를 검증하는 사람으로서, 손끝 감각으로 데이터를 판단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일상의 절반을 필기로 채우는 사람으로서 내가 원하는 볼펜은 단순한 디자인 제품이 아니었다. 오래 버티고, 흔들림 없이 기록하며, 실험자 특유의 감각을 일상에서도 이어갈 수 있게 해주는 도구였다. 그래서 내가 만들고 싶은 마이크로피펫 볼펜은 결국 전투용이라는 표현에 가장 가까운, 실험자가 직접 설계한 실험자를 위한 볼펜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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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볼펜은 단순히 실험실의 감성을 빌려온 물건이 아니라, 실제로 실험실에서 수백 번 반복된 동작과 수천 장의 문서를 기록하며 쌓아온 경험이 응축된 도구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이 볼펜을 손에 쥘 때마다, 품질을 위해 손끝으로 모든 것을 확인하던 그 시절의 집중과 정확성이 그대로 이어지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