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원이 실제로 사용하는 도구를 일상적인 제품으로 만들 수 있을까?

마이크로피펫 볼펜 제작기는 아주 단순한 질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실험실에서 매일 사용하는 마이크로피펫을 볼펜으로 만들면 어떨까?”
이 아이디어를 처음 구상한 시점은 2025년 5월입니다. 당시에는 제품의 형태도, 제조 방법도, 판매 방식도 정해져 있지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하나의 완성된 제품을 머릿속에 그려놓고 제작을 시작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분명한 방향은 있었습니다.
연구실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도구를 모티브로 하되, 단순히 실험기구 모양을 축소한 장식품이 아니라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볼펜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 글은 QCLAB 마이크로피펫 볼펜 제작기의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아직 디자인도 시작되지 않았고, 3D 모델도 없었으며, 제조사를 정하지도 않았던 시점에 어떻게 아이디어가 출발했는지를 기록하는 글입니다.
왜 하필 마이크로피펫이었을까?
마이크로피펫은 생명과학, 미생물학, 약학, 제약, 바이오 연구실에서 매우 익숙한 실험 도구입니다.
정해진 양의 액체를 정확하게 취급하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에 연구원에게는 단순한 장비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실험의 기본이 되는 도구이고, 반복적인 연구 과정 속에서 매일 손에 쥐는 도구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대학원 연구와 제약회사 QC 업무를 경험하며 마이크로피펫을 오랫동안 접해왔습니다. 그래서 마이크로피펫은 인터넷에서 찾아본 이미지나 단순히 떠올린 과학적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직접 사용해보고, 손에 쥐어보고, 실험실에서 반복적으로 마주했던 도구였습니다.
이 지점이 중요했습니다.
과학을 상징하는 이미지에는 원자 모형, 분자 구조, DNA, 현미경처럼 누구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요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이미지는 과학의 분위기를 보여줄 수는 있어도, 특정 연구자의 경험과 일상을 바로 떠올리게 하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반면 마이크로피펫은 연구실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형태만 보아도 빠르게 알아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는 사람은 한눈에 알아봅니다.”
이 문장이 이후 제품의 방향을 설명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습니다.
일반적인 과학굿즈와 다른 제품을 만들고 싶었다
처음부터 단순한 과학굿즈를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시중에는 실험실이나 과학을 연상시키는 다양한 제품이 있습니다. 과학적인 그래픽을 활용한 문구류도 있고, 연구실에서 사용하는 기구를 장식적으로 표현한 상품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조금 다른 접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과학을 설명하는 그림을 넣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가 실제로 알고 있는 도구 자체를 생활용품으로 다시 해석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마이크로피펫은 연구실에서는 매우 익숙하지만, 연구실 밖에서는 상대적으로 낯설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제품이 단순히 예쁜 문구류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전공과 업무, 연구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물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연구원이나 대학원생, 제약·바이오 업계 종사자에게는 일반적인 캐릭터 문구나 로고 볼펜과는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실험실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리게 하고, 누군가에게는 전공에 대한 자부심을 표현하는 물건이 될 수 있으며,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연구를 시작한 시절의 기억을 불러오는 제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제품의 기준을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연구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아볼 수 있어야 하고, 실제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단순한 장식품으로 끝나지 않아야 한다.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만들기 전에 먼저 정해야 했던 것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해서 바로 제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은 마이크로피펫의 어떤 특징을 남길 것인가였습니다.
마이크로피펫을 그대로 축소하면 형태는 비슷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볼펜으로 사용하기에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손에 쥐었을 때 불편할 수 있고, 부품을 결합하기 어려울 수 있으며, 펜으로서 필요한 기능을 담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펜으로 사용하기 좋게 바꾸다 보면 마이크로피펫이라는 정체성이 약해질 수 있습니다.
결국 처음부터 두 가지 조건을 동시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첫 번째는 마이크로피펫으로 인식될 수 있는 형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실제로 필기할 수 있는 볼펜으로 기능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방향을 요구합니다.
마이크로피펫의 외형을 최대한 살리려 하면 볼펜으로서의 사용성이 떨어질 수 있고, 필기감과 휴대성을 우선하면 일반적인 펜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제품은 처음부터 단순한 모형 제작이 아니었습니다.
실험 도구의 특징을 분석하고, 그 특징을 일상적인 제품의 구조 안에 다시 배치하는 작업이 필요했습니다.
‘모양을 닮게 만드는 것’과 ‘경험을 담는 것’의 차이
처음 아이디어를 구상할 때 가장 경계했던 것은 단순한 외형 복제였습니다.
마이크로피펫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만 목표로 삼으면, 제품은 실험도구 모형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들고 싶었던 것은 마이크로피펫 모형이 아니었습니다.
마이크로피펫을 알고 있는 사람이 손에 쥐었을 때 반갑고, 모르는 사람도 하나의 독특한 볼펜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제품의 기준은 외형의 재현보다 사용 경험에 더 가까웠습니다.
손에 쥐었을 때 자연스러워야 하고, 필기를 할 수 있어야 하며, 책상 위에 놓였을 때도 형태가 살아 있어야 했습니다. 동시에 연구자에게는 마이크로피펫의 인상이 전달되어야 했습니다.
이때부터 제품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습니다.
“마이크로피펫을 어떻게 작게 만들까?”가 아니라,
“마이크로피펫의 어떤 경험을 볼펜 안에 담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질문은 이후 디자인을 결정하는 과정에서도 계속 기준이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완성된 제품은 아니었다

현재의 QCLAB 마이크로피펫 볼펜을 보면 처음부터 지금의 형태로 결정된 제품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제작 과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이디어가 시작된 시점에는 손으로 정리한 구상과 방향만 있었고, 구체적인 제품 구조는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어떤 부분을 실제 마이크로피펫처럼 보이게 할지, 어떤 부분을 펜의 기능으로 바꿀지, 어느 정도까지 실험도구의 특징을 남길지 하나씩 판단해야 했습니다.
즉, 첫 단계에서 완성된 것은 제품이 아니라 제품을 만드는 기준이었습니다.
연구자에게 익숙한 도구에서 출발할 것.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볼펜이어야 할 것.
과학적인 분위기만 빌리는 것이 아니라 실제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할 것.
그리고 단순히 로고를 넣은 판촉용 볼펜과는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할 것.
이 기준이 정리된 이후에야 비로소 다음 단계인 디자인 구상으로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이 아이디어가 지금의 제품으로 이어진 이유

마이크로피펫 볼펜은 단순히 특이한 모양의 펜을 만들자는 생각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연구실에서 사용하는 도구를 오래 바라보고, 그 도구가 연구자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생각하면서 시작된 아이디어였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마이크로피펫이 단순한 실험기구일 수 있지만, 연구자에게는 실험을 준비하고, 시료를 다루고, 결과를 확인하던 수많은 순간과 연결된 도구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경험을 일상 속 제품으로 옮겨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QCLAB 마이크로피펫 볼펜은 단순히 “마이크로피펫처럼 생긴 볼펜”이 아니라, 실험실 경험에서 출발한 제품이 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2025년 5월, 아이디어를 처음 제품으로 구상하면서 세운 출발점이었습니다.
다음 제작기에서는 이 아이디어를 실제 제품 형태로 옮기기 위해, 마이크로피펫의 어떤 요소를 남기고 어떤 요소를 새롭게 해석해야 했는지에 대해 이어서 기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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